거룩한 일꾼

예수님께서 자주 쓰시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당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비유였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은 그의 인도를 받아 낯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마침내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문’으로 비유하신 말씀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들어설 때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들어가야 할 공간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이 나았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시기에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면, 우리가 설령 고난을 겪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와 지도자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서 열어 주시는 문으로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은 내 감각을 자극하고 장밋빛 희망으로 포장된 유혹의 손길이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라고 외친 베드로 사도의 경고가, 2천 년이 넘은 오늘에 더 절박하게 들리는 듯싶습니다.우리는 모두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소 주일인 오늘은, 스스로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에 복음의 참된 기쁨을 선포할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 교회는 거룩한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용기를 갖고 기쁘게 각자 받은 부르심에 따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죽음으로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엠마오의 두 제자는 성경에 예언된 구세주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부활의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됨을 깨닫습니다.

성경을 읽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필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고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치를 확인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하느님의 사랑을 뼛속 깊이 느꼈듯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사랑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기’ 살아 계시며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부활의 은총은 ‘흠 없고 티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처럼 수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죽음의 나라를 벗어난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신앙인의 커다란 특징은 죽음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성덕에 올라간 성인일수록 죽기를 더 바란다고 합니다.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요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믿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를 위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발현하신 부활 대축일 저녁에 그는 사도들의 은신처에 숨어 있지 않고 바깥소식을 탐문하려고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직접 그분의 다섯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로 보아 그는 호기심이 많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만지고 옆구리 상처에도 손을 넣어 사랑의 표지를 느끼고 싶어 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채시고 토마스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응답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 흘러나옵니다. 거기서 죄의 용서와 영혼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상처에 다가가는 모든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호흡합니다.

두 번째 아담이신 주님께서는 창조의 생명력보다 훨씬 강력한 부활의 생명력을 자녀들에게 부어 주십니다.

부활의 체험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추억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헌신 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새벽녘에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께 자기도 물위로 걸어 올 수 있게 해달라는 베드로의 요청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비로소 물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주님을 보지 않고 파도를 보자 두려운 마음에 즉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림을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잊어버리고 세상적 유혹에 빠져 불안과 두려움에 살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결코 쉽지만은 않은 우리 삶의 여정에서 과연 나 자신은 얼마나 견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행복할 때엔 감사함 대신 나의 교만함을 치켜세우기 급급했고 슬프고 외로울 때엔 믿음 대신 원망과 두려움으로 세상을 탓했던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부활 주일은 연중 교회 전례력에서 가장 큰 축일이라고 합니다. 무참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 죽음의 어두움을 뚫고 찬란한 빛이 되시어 어둠과 고통 속에 갇힌 우리들에게 오시는 날입니다.

한없이 교만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받고도 깨닫지 못했던 나, 또 우리 가족 모두에게도 너무도 기쁜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둠 속에서 찬란히 부활하심을 믿으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주셨던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며, 이제는 어둠과 세속에서 슬퍼하고 힘겨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베풀며 살아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의 기쁨을 모두와 함께 나누며, 주님의 부활의 기쁨에 온 세상에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주님을 부활을 기뻐하며……

 

– 김 영 사도요한 

은돈 서른 닢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 나오는 ‘은돈 서른 닢’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몸값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을 노예의 몸값으로 쳐서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돈을 주었던 것입니다.

수난 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처지가 되셔서 죄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의 눈물입니다. 죄를 짓고 뉘우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신앙인의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바라빠 대신 예수님을 처형하라는 군중의 모습도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기쁨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야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 체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면서 십자가의 아픔과 고독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분을 배반하는 행렬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한없는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우리에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성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은총의 눈물로 변화하여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