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하느님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타자”, 곧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인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분과의 계약,
곧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바칠 만한 절대적 충실함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짐을 지워 줍니다. 반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메시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드려야 할 봉헌도 율법 안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종교적으로 거룩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의 근본적인 선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인간은 평화를 원하는데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데, 세상에는 미움과 불의와 질투가 가득합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의 심연에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찾지만,

현실에서는 부와 명예와 우상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인간의 이러한 내면적인 갈등이 해소되고,

가장 심오한 원의들이 실현되리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할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재산이나 입고 다니는 옷으로 그를 평가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은 가난한 옷을 입고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도 가지지 않고 그저 집주인이 주는 것을 먹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행복은

세상이 주는 부와 명예와는 차원이 다른 행복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구원의 메시지는 세상의 메시지와 맞서야 하고,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들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늘 박해와 고통 등의 십자가가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단순한 고행이나 윤리적인 삶,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지는 것을 넘어섭니다.

십자가는 곧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 아니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고 확신이며,

그 나라를 미리 이 땅에서 실현하는 예언입니다.

아버지의 눈물

 

탕자 비유의 아버지는 많이 아팠다.

그는 실망, 반발, 욕구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떠나는 작은아들을 보았다.

또한 화가 잔뜩 나서 자기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큰아들을 보았다.

그의 생애 대부분이 기다림으로 채워졌다.

작은아들을 강제로 데려올 수도 없었고 큰아들의 불만을 채워줄 수도 없었다.

오직, 그들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었을 뿐.

 

이 오랜 기다림의 세월 동안,

아버지는 많이 울었고 여러 번 죽었다.

그는 고통으로 인하여 텅 빈 몸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비어있음(emptiness)이,

때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들을 환영하는 장소로 되었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헨리 나우웬

저를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

주님,

하루를 마무리하며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섰습니다.

당신께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려고 힘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께는 제가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

숨길 수도 없습니다.

앉거나 서거나

저를 환히 꿰뚫어보시는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진실을 좋아한다고,

저는 언제나 단순하고 투명하다고 큰소리 쳐 왔습니다.

남들에게 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달라고 억지를 써왔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참이라면

억지나 설득이 아니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을……

저는 설득하느라 힘을 너무 많이 씁니다.

 

하느님,

저의 주님,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살면 세상 편하고 자유로운데

스스로 체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이제는 어리석은 눈가림으로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던 날들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당신이 주신

그 고귀한 자유를 누리며

아버지 집에서

귀한 자식 대접을 받게 해주십시오.

 

−김현옥 수녀(성바오로딸 수도회)

그래, 그랬으면 됐지

살아계시면 올해 백세를 넘기셨다는 가톨릭 성서학자 선종완 신부. 출판을 앞둔 공동번역 성서가 마지막 교정을 거칠 때 잠시 심부름한 인연이 있어서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신교에서는 문익환 목사, 구교에서는 선종완 신부가 구약번역 책임자였다. 문 목사는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으니 수시로 만날 수 있지만 선 신부는 와병중이라 외출할 수 없어서 내가 그분 숙소를 오가며 마지막 원고를 손봐야 했다.

그분에 대하여 아무 아는 바 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겸손한 모습은 그분이 머물던 방의 가난한 정경과 함께 잊히지를 않는다. 혜화동인가? 동성고등학교 울타리 안에 무슨 수도원(?)이 있었고, 그분의 거처가 거기였다. 처음 그분 방에 들어갔을 때, 지금도 기억난다. 아, 이게 수도자의 토굴이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한마디로 부러웠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간이침대 하나, 나무 테이블 하나, 걸상 하나,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채 놓여있는 라틴어 성서 한 권, 벽에 걸려 있는 작은 십자고상, 이게(내 기억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평생토록 그 방의 ‘가난’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진실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휴정선사의 일표일납(一瓢一衲)이면 족하지 뭘 더 가진다는 게 마냥 구차하게만 생각되었다.

이런 내게 아내는 말했다. “그럴거면 첨부터 장가를 들지 말았어야지!”

옳은 말이다. 정말 그런 줄 모르고 결혼했다. 결혼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은 그날 본 사제의 가난한 방을 떠나지 못했다.(물론 그날 내가 본 것은 살림살이를 따로 갖추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수도자의 방이다. 가정을 꾸민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덕분에 이제까지 ‘더’가 아니라 ‘덜’을 생각하며 살았다.

공자는 넘침과 모자람이 같다고 했지만, 그건 원론적인 말이고 실제로는 넘치거나 모자라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저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처럼.

그래서 나는 모자란 게 넘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배고픈 건 죄가 아니로되 배불리 먹는 건 죄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과 내 삶은 늘 거리가 멀었지만 ‘더’보다 ‘덜’을 지향하며 살아온 것만큼은 내 양심이 보증하는 진실이다.

선종완 신부는 당신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원고가 책으로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선종하셨다. 하지만, 당신 의지와 상관없이, 평생토록 가난하게 살고 싶을 따름인 어느 목사에게 좋은 선물을 남기셨다. 그래, 그랬으면 됐지.

—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