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시면 올해 백세를 넘기셨다는 가톨릭 성서학자 선종완 신부. 출판을 앞둔 공동번역 성서가 마지막 교정을 거칠 때 잠시 심부름한 인연이 있어서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신교에서는 문익환 목사, 구교에서는 선종완 신부가 구약번역 책임자였다. 문 목사는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으니 수시로 만날 수 있지만 선 신부는 와병중이라 외출할 수 없어서 내가 그분 숙소를 오가며 마지막 원고를 손봐야 했다.

그분에 대하여 아무 아는 바 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겸손한 모습은 그분이 머물던 방의 가난한 정경과 함께 잊히지를 않는다. 혜화동인가? 동성고등학교 울타리 안에 무슨 수도원(?)이 있었고, 그분의 거처가 거기였다. 처음 그분 방에 들어갔을 때, 지금도 기억난다. 아, 이게 수도자의 토굴이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한마디로 부러웠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간이침대 하나, 나무 테이블 하나, 걸상 하나,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채 놓여있는 라틴어 성서 한 권, 벽에 걸려 있는 작은 십자고상, 이게(내 기억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평생토록 그 방의 ‘가난’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진실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휴정선사의 일표일납(一瓢一衲)이면 족하지 뭘 더 가진다는 게 마냥 구차하게만 생각되었다.

이런 내게 아내는 말했다. “그럴거면 첨부터 장가를 들지 말았어야지!”

옳은 말이다. 정말 그런 줄 모르고 결혼했다. 결혼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은 그날 본 사제의 가난한 방을 떠나지 못했다.(물론 그날 내가 본 것은 살림살이를 따로 갖추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수도자의 방이다. 가정을 꾸민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덕분에 이제까지 ‘더’가 아니라 ‘덜’을 생각하며 살았다.

공자는 넘침과 모자람이 같다고 했지만, 그건 원론적인 말이고 실제로는 넘치거나 모자라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저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처럼.

그래서 나는 모자란 게 넘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배고픈 건 죄가 아니로되 배불리 먹는 건 죄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생각과 내 삶은 늘 거리가 멀었지만 ‘더’보다 ‘덜’을 지향하며 살아온 것만큼은 내 양심이 보증하는 진실이다.

선종완 신부는 당신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원고가 책으로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선종하셨다. 하지만, 당신 의지와 상관없이, 평생토록 가난하게 살고 싶을 따름인 어느 목사에게 좋은 선물을 남기셨다. 그래, 그랬으면 됐지.

—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