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외침은 시공간을 가르고 오늘날에도 전해집니다.

열심히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례하고, 봉사 활동을 하며, 기도를 열심히 해도 정작 세상은 별로 변하는 게 없어 보입니다. 불의한 세상은 변할 줄 모르고, 폭력은 여전히 세상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호소는 우리의 가슴속에서 오늘도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설마 우리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조차 없을까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믿음이 겨자씨만도 못한 것이 아니라, 겨자씨보다 더 큰 불신과 미혹이 풍성한 나무가 될 겨자씨를 짓누르는지도 모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고, 그것을 잘 간직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격려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목소리보다 주님의 목소리를 더 듣고자 할 때 성장하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은 이 땅의 평화를 지키는 군인들과 군 사목을 하는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군인 주일입니다.

교회가 군인들을 사목하는 이유는 국가의 안전을 위한 평화의 지킴이인 군인들을 격려해 주고, 그들이 국가에 봉사하면서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소명을 잊지 않도록 사목할 책임을 교회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군사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옥 벌의 영원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가혹한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부자는 지옥 불의 맹렬함에 후회를 하지만 심연으로 갈라진 천당에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만족에 빠져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자신의 다른 가족은 지옥에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강을 건너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주님께 바쳐질 때 반드시 천상의 보상을 받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고 권세를 누려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억눌린 사람,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먼저 보살피는 분이십니다.

오늘 비유는 이 점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두려운 것입니다. 천당에서는 이 세상에서 첫째가 꼴찌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부자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무한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권세 있는 사람을 낮추시고 가난한 사람을 들어 높이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후에 지옥에서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집사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불의한 집사’는 비윤리적이면서도 영리한 사람입니다.

집사의 주인은 재산을 제멋대로 낭비한 그를 해고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살길을 찾으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줍니다. 주인은 매우 너그러운 사람이어서 집사의 이 그릇된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칭찬합니다.

실직의 위기에 있는 집사가 살아남으려고 애쓴 처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 방식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우리가 천상의 것을 추구하지만, 이 지상의 재물을 관리하는 데에도 성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지만 재물로 사귄 친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한 재물을 관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이유는 재물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실한 삶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을 훈계하였습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우리는 고집스럽고 오만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그분의 길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였을 때,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재앙을 내리려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죄인들에게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간청을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자비로 죄인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죄 많은 우리가 당신에게 돌아와서 자비로운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십니다. 마치 거지나 다름없는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멀리서 즉시 알아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에게 넘치는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의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이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천사들을 기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자만하여 죄인의 회개를 시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바오로의 길

바오로 사도의 늙은 모습과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더욱 실감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도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

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몹시도 힘든 길이며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욕망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갈 십자가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주님과 분리될 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작은 희생과 고통들을 구원의 열매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용기를 통해 교회는 건설됩니다.

우리가 지니는 전적인 신뢰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