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합 후에 바치는 밤 기도

오늘 저녁 스타디엄에서의 밤은 만 명의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경기장을 밝히는 조명등이 환하게 밝혀지던 순간 스타디엄은 만 명의 관객들이 제각기 질러대는 환호의 목소리로 뒤흔들렸었지요. 심판이 시합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공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공은 손에서 손으로 패스되었고, 경기장 바닥을 미끌어지기도 하다가, 저 멀리 머리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각 선수들은 제각기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하며 자기에게 패스되는 공을 받아서 그 다음 포지션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수가 그 공을 받도록 또다시 패스해 줍니다. 그리하여 밝은 불빛 아래서 각 선수들이 자기네들이 맡은 바 역할을 잘 이행했기 때문에, 해야 할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그 공은 느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골 에리어에 가 닿게 되어서 마지막 점수를 내게 되었지요.

주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저희들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위치가 있지요.

먼 앞날을 미리 내다보시는 코치이신 주님께서 미리 그러한 저희의 위치를 계획해 놓으셨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 위치에 있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형제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리 또한  형제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맡고 있는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가 현 위치를 지키고 있는 그 강인함이 중요한 것이지요. 제가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는 한 제가 조금 앞으로 나아가든 조금 뒤로 물러나든 그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주님, 이제 제 눈앞에서 하루 해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남들이 하는 일에 대한 비평이나 하면서 너무 멀리 가장자리로 나가서 서있기만 하진 않았는지요? 저는 과연 제가 맡은 역할을 훌륭히 이행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 편의 활동을 둘러보셨을 때 주님께서는 거기 있던 저를 발견하실 수 있으셨는지요? 경기장 다른 쪽 편에 있던 선수가 저에게 패스해 준 공을 저는 잘 잡아 주던가요? 저는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 팀에 힘껏 협력을 해 주던가요? 저는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고 자랑스러워 하지는 않던가요?

주님, 저는 이제 탈의실에 쉬러 들어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밀어주신다면 저는 내일 한 명의 새로운 쿼터백으로 열심히 뛸 것이며, 또한 매일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저의 모든 형제들과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서 마지막 호각을 부시어 저희의 삶을 중지시키실 때 주님께서 저희에게 기대하신 만큼 저희가 천국의 우승컵을 얻어 가지게 해 주시옵소서.

— 미셸 구와스트 신부

희망 연습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했습니다.

땅은 불덩이 같았고 길은 멀었습니다.

뜨거운 햇빛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외쳤습니다.

‘더는 못가겠어요. 지치고 목말라 죽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격려했습니다.

‘조금 더 가보자. 사람 사는 마을이 있을 거다.’

두 사람은 계속 걸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포기합니다.

그러다 무덤을 발견하자 맥없이 말합니다.

‘봐요. 아버지,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 죽었을 거예요.’

아들은 털썩 주저앉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합니다.

‘아니다. 무덤이 있다는 건 사람이 있다는 거다.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을 거다.’

과연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마을을 발견합니다.

그들에게 무덤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습니다.

얼마만큼 희망을 안고 살고 있는지요?

가까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지요?

희망 역시 덕(德)입니다.

삶의 에너지입니다.

그러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투자 없이 가만있는데 깨달음에 닿을 순 없는 일입니다.

먼저 뛰어들고 먼저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생생한 희망을 원합니다.

기대감 넘치는 미래를 바랍니다.

돈 많고 재산이 넘친다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셔야’ 희망찬 삶이 가능해집니다.

— 미주 가톨릭신문 <사제일기> 중에서

아침의 기도

이 아침에

찬란히 떠오르는 빛은

이 땅 어느 곳에나

비추이게 하소서.

 

손등에 햇살을 받으며

봄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병상의 아픔에도,

 

젊은이들의 터질 듯한 벅찬 가슴과

외로운 노인의 얼굴에도,

희망과 꿈이 되게 하소서.

 

또 다시 우리에게 허락되는

365일이

삶의 주머니 속에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의

결실로 가득 채워,

 

한 해를 다시 보내는 날은

기쁨과 감사를 드리게 하소서.

 

이 해는,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건강한 사람들은 아픔의 사람들을,

평안한 사람들은 외로운 가슴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손길이 되게 하소서.

 

이 새로운 아침에

찬란히 떠오르는 빛으로

이 땅의 사람들의 영원을 향한

소망을 이루게 하시고,

 

이아침의 기도가

이 땅 사람들이

오천년을 가꾸어 온 사랑과 평화로

함께 하소서.

— 용혜원

2016년의 화두 – 절제

꿈을 지닌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은 떠나지 않습니다.

2016년엔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가끔은 터널 속을 걷겠지만 은총이 함께 할 것 또한 희망합니다.

삶은 본질적으로 밝습니다.

꿈을 접기에 부담스런 멍에로 남을 뿐입니다.

내년엔 주일미사 한 번도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해보십시오.

황새는 매우 오래 삽니다.

과식하지 않는 것이 이유라고 합니다.

먹이를 발견해도 양만큼 먹곤 절대 더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황새가 오래 산 원인은 절제였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제하면 하늘의 기운이 곁에 머뭅니다.

누군가 절제를 질주하는 자동차 브레이크에 비유했습니다.

그 절제를 2016엔 화두로 삼으려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요한복음은 그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지난 한해 돌아보면 진정 주님께서는 애정으로 대해주셨습니다.

모든 사건과 만남 뒤엔 그분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은총이며 축복이었습니다.

기쁜 일은 기쁨으로 아픈 일은 아픔으로 감동이고 감격이었습니다.

이젠 정말 깨달음의 길로 가야겠습니다.

사랑의 길을 말없이 걸어야겠습니다.

‘나는 책꽂이서 한 권의 책을 뽑아 읽었다.

이제 다시 그 책을 책꽂이에 꽂는다.

하지만 나는 지난날의 내가 아니다.’

앙드레 지드의 말입니다.

우리는 2015년이란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제 그 책을 다시 우주의 책장에 꽂습니다.

지난날의 내가 아닌 모습으로 꽂습니다.

 

— 미주가톨릭신문 <사제일기> 중에서

자비의 희년에 바치는 기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자비로워지라고 가르치시며
주님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저희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자캐오와 마태오를 돈의 종살이에서 풀어 주시고
피조물에서만 기쁨을 찾던 간음한 여인과 막달레나를 구원하셨으며
베드로가 배반을 한 뒤에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참회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셨나이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듣게 해 주소서.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보이는 얼굴이시며
용서와 자비로 모든 이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얼굴이시니
이 세상에서 교회가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의 보이는 얼굴이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섬기는 이들도 나약함으로 갈아입고
무지와 잘못에 빠진 이들과 함께 아파하기를 바라셨으니
주님을 섬기는 이들을 만나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보살핌과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소서.

주님의 영을 보내시고 그 기름을 부어 주시어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며
자비의 희년이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되어
주님의 교회가 새로운 열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억압받는 이들과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해 주소서.

자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비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