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따라가는 길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 불은 성령의 불, 하느님을 향한 열정의 불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불길이 훨훨 타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길이 타오르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하시며 그 길이 수난의 길임을 역설하십니다. 진정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가치가 틀리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가족 관계나 인간관계에서도 의견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불화나 분열마저 생길 수 있지요.이를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사상 체계나 정치 사회적 관습을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라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많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그 뜻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달라지며,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그분의 뜻에 맞는 것인지 분별해 내야만 합니다. 지혜롭게 판단하지 못할 때, 또 다른 불화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길 것입니다.

 

늙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오주님 !

내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다는 것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는 것을 당신이 더 잘 아십니다

어디에서든 내가 나서야 일이 된다는

착각을 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타인의 일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

나의 과도한 열정을 다스려주소서

사색을 하되 사변적이지 않고

도움을 주되 지배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게 하십시오

내게 엄청난 지혜가 쌓여있어

혼자만 가지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나 주님 내게도 친구 몇 명은 필요합니다.

잔소리 속에 불필요한 것을 낱낱이 열거하지 않게 하시고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직관을 허락하여주소서

내 몸의 아픔과 병에 대해

침묵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시오

병의 고통은 점점 심해지고

엄살에 대한 유혹은 점점 커집니다

남의 엄살을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재능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참고 들을 수 있는 인내심을 주소서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지혜를 배우게 하십시오

그리고 남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성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성자와 성녀와는 밥 한끼 같이 먹기도 불편합니다

하지만 말도 붙일 수 없이

괴팍한 노인네가 되기는 싫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 그 재능을 입 밖에 내는

훌륭한 재능도 겸비하게 하소서

 

− 안젤름 그린

진정한 부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삶의 확실한 안전판을 갖고자 합니다.

죽는 날까지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을 마련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재산을 많이 모아 둠으로써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기에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또한 돈은 인간에게 권력을 주기도 합니다. 돈을 가진 자는 그것을 이용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자고이래로 돈이 권력이 되고 우상이 됩니다.돈에 대한 갈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이웃을 형제가 아니라 극복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유산을 나누는 것 또한 가족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며, 때로는 유산으로 가족이 분열되기도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의 분할에 관한 재판을 해 주시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재판관이 되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그리고 삶의 확실한 기초는 재산이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재산의 사용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모든 재화는 개인주의로 인한 분열의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나눔으로써 친교를 이루는 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재산을 움켜쥐지 않고 손을 펴 가난한 이들과 나눌 때, 하느님만이 주시는 참된 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고통에서 배우기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자비와 사랑이 샘솟게 할 수 있다.

이해, 사랑, 자비 없는 행복은 불가능한 것이다.

고통에서 이해와 자비가 생겨난다.

고통을 이해할 때 우리는

아무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자비를 베푼다.

그래서 고통이 쓸모 있는 것이다.

고통을 다룰 줄 모르면 고통의 바다에 익사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을 다룰 줄 알면

그 고통에서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안에는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성향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성향이 우리한테 있다.

그 고통이 때로는 매우 유익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 자신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고통의 선함’(the goodnessofsuffering)을 말할 수도 있다.

고통에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

이해와 사랑 없는 곳에는 어떤 행복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고통이 행복에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붙잡고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부드럽게 붙잡고 그것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고통에서 배울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고통의 선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고통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진흙탕 없이는 연꽃이 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괴로워하는 방법을 알면

모든 고통이 오케이다.

그런 태도를 갖출 때 당신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행복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 틱낫한

 

마리아와 마르타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필요한 덕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이방인이며 노예로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르타는 음식을 잘 준비해서 예수님께 맛있게 대접하려고 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맞아들이고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첫 번째 자세는 바로 듣는 것입니다. 손님의 뜻을 먼저 듣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차리는 것은 대접이 아니라 자기 과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접대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의 공간을 ‘조금’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분의 가치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삶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이웃이 되어 주고 봉사해야 할 이들이 보입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노인이든,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든, 삶의 의미를 상실한 노숙자든 모두 다 우리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초대요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