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증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종말에 대한 말씀은 묵시 문학적 표현으로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종말은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구원과 희망의 대상입니다. 천지창조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사랑의 계약을 맺으셨고, 또한 그 계약에 끝까지 충실하십니다.

반면 인간은 그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고,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구원자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분께서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마지막 때를 여시고, 이어서 모든 생명이 충만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거저 오거나, 우리와 관계없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마치 외부에서 주어지는 마술 행위나 기계적 행위처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시대의 징표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징표를 알아듣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이 구원 사업에 직접 참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중심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있고, 그 안에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의 편을 가르는 모든 벽이 다 허물어져, 완벽한 그분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적들에게 승리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죽음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으로 받아들인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가장 위대한 사랑이 실현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성실히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로 시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의 삶이 어제의 결과이고, 또 오늘 삶의 결실이 내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 우리 안에 엄습합니다.

내가 나이 들어서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 내가 병들었을 때 누가 나를 챙겨 줄까?

그리고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죽음에 대해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시각과 감정, 또는 두려움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까지 이어지지만,

사실 우리는 그 이후를 경험해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곳의 셈법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습관적으로 이 세상의 삶에 비추어 하늘나라를 그려 보지만,

그곳의 시간은 여기와 어떻게 다른지,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될지,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 주실지, 두려운 마음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의 모습은 이 세상의 셈법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참여한 이들은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그리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알려 주시며,

다시 우리의 시선을 ‘오늘’로 돌려주십니다.

오늘을 성실히 살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면 부활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실 것이고

이 확신으로부터 신앙인은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자캐오의 구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며 마침내 완성하고자 하시는 구원 업적의 예표와도 같이 묘사됩니다.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 규정에 따라 철저하게 지켜지고 강조되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거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아예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자캐오가 로마의 지배하에 세금 징수 업무를 위임받아 제국의 압제자 노릇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가 받은 멸시와 비난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민족에게서 외면당한 자캐오라고 해서 위대한 예언자, 메시아로 칭송받던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먹고살려고 지배 세력에 협력하고 있지만, 그 불편한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냥 예수님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자신을 쳐다보는 자캐오의 속마음을 읽어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내려오라’는 말 속에는 그의 욕심, 자책감, 상처를 버리라는 요청이 들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머물기까지 하십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했듯이, 그토록 소중한 재산을 내어놓겠다고 선언하는 자캐오의 마음에는 주님의 ‘불멸의 영’이 살아 있었고, 그 영을 일으켜 주신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오늘’ 구원을 선포하고,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하십니다.

자비는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선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함께, 곁에”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버림받고, 위험에 빠지고, 불신의 늪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신뢰와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면서 말없이 곁에서 손을 잡아 주며 함께 아픔을 견뎌 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은 누렸지만, 예수님 없이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복음을 전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 자리에서조차 더러 의심하고, 불신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 약속은 협조자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선포하게 하시며, 교회를 성장시켜 주심으로써 성취됩니다. 성령의 현존은 바로 예수님 약속의 보증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법입니다. 내 믿음도 부모님이나 친구, 지인들의 안내와 전교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내 믿음의 멘토(스승)나 후견인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믿음의 멘토이자 후견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외침처럼 우리 안에서 먼저 복음의 기쁨이 움터 나올 때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내 주변에 믿음을 잃고 있는 교우는 없는지 먼저 찾아보고 그들을 향해 달려갑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

사는 것 자체가 은총이란 말이 있습니다.
숨 쉬는 순간부터 내 삶의 한순간도 거저 얻어진 것은 없습니다.
돌아보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고,
‘살아 있음’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이 기적 같은 인생에 감사하는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과 분노로 탄식하는 순간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족보다는 불만에 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었던 그들의 치유에 대한 간절한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시니 그분의 치유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한 사람, 그것도 ‘외국인’으로 표현된 이방인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젠가 다시 병들고 쓰러질 육체적 병의 치유가 아니라,
성실하신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회개와 치유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은,
당장 나병이 나은 것에 만족하고 돌아간 다른 아홉에게 주어지지 않은
진정한 치유와 자유였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요르단 강에서 물로 씻기만 했을 뿐,
나병이 나을 것이라 믿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기뻐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속된 땅에서 흙을 실어 가져가며
오직 주님께만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마음의 회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오로지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