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이사야가 예언한 빛의 이미지는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에 의해 새롭게 탄생합니다. 그 구원의 빛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갈릴래아 땅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큰 빛이 비쳐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밤처럼 우리의 인생은 실패를 거듭하고 고통으로 점철될 때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한 외침과 갈망의 빛이 솟아오릅니다. 이미 어두운 밤은 사라져 가고 인생의 새벽이 예수님과 함께 시작됩니다.믿음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어두운 삶은 밝아지고 변화합니다. 신앙을 받아들이면 지난날의 삶을 참회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어둠 속에서 주님의 빛을 발견하면 힘이 솟아나 새로운 인생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출 때 우리는 진리와 사랑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납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쾌락과 물질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기게 됩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향하는 영혼은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어두운 밤은 더욱 신비롭게 그분에게로 다가가는 발걸음입니다.

낙오자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회생의 움직임을 보일 때, 은총은 타오르고 하느님께 나아갈 길을 비추어 줍니다. 은총의 ‘빛’과 하느님 상실의 ‘어둠’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실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빛’과 나의 ‘어둠’은 어떠한 것입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볼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세주를 위해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요한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일어난 거룩한 표지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의 은총과 효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예언자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완전한 정화의 은총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20 참조) 세례를 받을 때,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진 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로마 8,16).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마음과 영혼 안에 움직이고 계시는 성령을 망각합니다. ‘영’은 영혼의 상층부이며 하느님을 감지하는 장소입니다.

성령께서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움직이고 계시므로 그분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잠심(潛心)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을 그분에게 향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큰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 가는 길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이 베들레헴으로 동방 박사들을 안내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알아보고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보고 경배하며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께서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서광을 비추셨습니다.동방 박사들의 여행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의지하여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여정은, 많은 노고와 위험이 따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서는 우리의 길도 이와 비슷합니다. 강도의 위험, 쾌락의 위험, 불신의 위험이 늘 주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여정은 커다란 용기와 도전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를 ‘진리이신 분’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의 빛이 비칩니다.

구세주를 만나고 경배하는 기쁨은 인생의 여러 가지 경로를 헤맨 뒤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사건, 망설임, 방황하는 삶 속에서도 그 빛은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을 찾아 나설 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우리는 구세주의 신성을 알아보는 기도와 희생을 바칠 때 커다란 기쁨을 얻습니다. 베들레헴은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출발점입니다.

죄의 어두운 밤을 비추고 있는 베들레헴의 빛은 골고타 십자가의 길에서 구원이 완성되는 종착점까지 늘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합니다.

행복과 평화

목자들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목동들의 이야기와 축하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변화를 마음속에 새기셨습니다.

새해 첫날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우리 안에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과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물고자 하시며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과 희망을 주고 계심을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종’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 사랑과 희망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여야 하겠습니다. 행복의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행복을 빕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평화를 빕니다.” 하고 기원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하느님에게서 오지만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견디어야 합니다.

성모님의 삶은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삶이었지만 아드님의 가시밭길을 함께 가신 삶이었습니다.

성탄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해마다 태어나시는 이유가 우리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오늘 복음처럼 우리도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달리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 만큼 때로 황량한 사막에 들어온 느낌마저 들지요. 사막과도 같은 세상에서 영적인 물을 퍼 올려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평화와 기쁨은 내 힘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라 하겠습니다.아울러 성탄은 이웃을 향한 의무의 시기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나와 함께 계시듯이, 나 역시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