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경제적 불평등과 이민족의 지배로 인해 군중이 겪는 빈곤과 박탈감, 분노와 슬픔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군중을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쾌하면서도 감동적인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먹고, 입고, 자는 일, 곧 의식주입니다. 여전히 절대적 빈곤층이 지구상에 넘치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모질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며 걱정하는 것은, 절대적 빈곤층이 겪는 고민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넘치는 먹거리들 가운데 골라야 하는 어려움을 느끼고,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건강관리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옷장에 가득 찬 옷들을 보면서도 ‘입을 옷이 없다.’며 한숨을 쉬고, 남들이 살고 있는 집과 자동차, 연일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멋진 남녀들의 모습을 보면 없던 걱정도 되살아납니다.

우리의 걱정거리가 정말 우리가 살고 죽는 본질적인 고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걱정거리 이전에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해 온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해 왔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내가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잘 입는’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고,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나를 더 귀하게 여겨 주시고, 훨씬 더 잘 입혀 주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내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게 한다면, 나는 분명히 재물의 풍요로움에 마음이 갇혀,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로 살지 못하고, 내일을 미리 오늘로 앞당겨 사느라,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도, ‘내 바위, 내 구원’이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원수를 사랑 하여라

“너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갖추라고 하십니다. 속물근성이 가득한 내 모습과, 늘 바퀴 하나 빠진 존재 같은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룩하고 완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살면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찾고, 꾀를 부려 세상을 살기 때문이죠. 내가 이룬 성공, 내 능력에 대한 자랑과 내가 알고 지내는 좋은 인맥이 나를 성공시켜 줄 것이란 헛된 희망을 갖고 삽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적대로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는 말씀이 공감 가는 시대입니다. 유다인들은 레위기의 가르침대로, 자기 동족을 미워하지 않고,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는 것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족은 서로 돕고 질책하며 격려해서 공존하는 삶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웃 사랑은 이민족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갖는 거룩함과 완전함을 자신들만의 성공에 가두려는 숨겨진 욕망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이웃 사랑의 길을 일깨워 주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결국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의 방식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걸림돌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직접 하느님 방식으로 사랑해 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거룩함과 완전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5─7장)를 들으면, 구약 성경의 집회서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읽을수록 감추고 싶은 내 치부가 하나씩 드러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중죄를 넘어 죄의 근원인 내면의 죄까지 단죄하십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 정당하더라도 아내를 버리는 사람, 헛되게 거짓 맹세를 하는 사람. 당장은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죄는 아니지만, 결국에는 죄에 이르게 하는 우리 영혼의 죄들을 피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윤리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옛말처럼, 내 의도와 속내까지 깨끗하다고 자부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철저한 내면적 도덕 가치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이 지닌 편향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죄를 일으키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지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동물적 감각에로 귀의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깊은 병은 자신 안에 있는 신적 지성을 잃고, 동물적 감각을 탐닉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내 영혼이 지향하는 것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감각이 지향해야 할 신비롭고 감추어진 지혜를 전합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는 고백은 하느님을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탐닉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찾은 사람은 율법 조항에 얽매이지 않고도, 내면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작은 계명 하나라도 지키고 가르치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라는 집회서 저자의 말씀에 귀 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빛과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 이 둘은 살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들을 대변해 주는 표징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적절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어떤 제도나 이념, 권력과 폭력이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설령 그런 것들이 사람들을 통제와 규율 속에서 획일화하고, 왜곡된 가치 질서에 잠시 물들게 할 수는 있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 없이 세상의 변화를 만날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고 명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며,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신앙인의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적인 자아를 꿈꿉니다. 현실에서 성공이 재산과 권력에 달려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행복과 평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도 성경은 한결같은 원칙을 고수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이사야 예언자가 여전히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진리입니다.

진정한 행복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세속적인 기준에 따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이른바 착한 사람들, 의롭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행복을 채워 주시면,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참된 행복이 마음속에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산상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산상 설교의 참된 행복은 현실의 역동성 안에 드러나는 것이지, 미래에 막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지상에서 가난한 마음, 겸손의 영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를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함과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서 주어지는 예수님의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의 삶 속에 불멸의 평화가 가득 찹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다가 어려움이나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불사불멸의 즐거움, 영원한 상급의 전조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이 내 안에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