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5─7장)를 들으면, 구약 성경의 집회서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 읽을수록 감추고 싶은 내 치부가 하나씩 드러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중죄를 넘어 죄의 근원인 내면의 죄까지 단죄하십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 정당하더라도 아내를 버리는 사람, 헛되게 거짓 맹세를 하는 사람. 당장은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죄는 아니지만, 결국에는 죄에 이르게 하는 우리 영혼의 죄들을 피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윤리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옛말처럼, 내 의도와 속내까지 깨끗하다고 자부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철저한 내면적 도덕 가치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이 지닌 편향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죄를 일으키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지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동물적 감각에로 귀의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깊은 병은 자신 안에 있는 신적 지성을 잃고, 동물적 감각을 탐닉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내 영혼이 지향하는 것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감각이 지향해야 할 신비롭고 감추어진 지혜를 전합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는 고백은 하느님을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탐닉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찾은 사람은 율법 조항에 얽매이지 않고도, 내면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작은 계명 하나라도 지키고 가르치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라는 집회서 저자의 말씀에 귀 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