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기 전에 마르타에게 물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과 가족들의 슬픔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며 인류의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심정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워라.”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은총을 받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돌처럼 굳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치우고 자녀다운 신뢰를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기도와 선행은 우리 마음의 돌을 치우는 노력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차디찬 마음을 따듯하게 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은 인류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르타처럼 믿음을 고백하면,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죽음의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장님의 눈을 띄워 주신 예수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 장면은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창세 2장 참조).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이지요. 이어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자 그의 눈이 밝아집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자신들의 논리에 갇히고는 예수님을 죄인 취급해 버립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눈을 뜬 사람과 그의 부모까지 몰아붙이지요.

부모는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추방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얼버무려 버립니다.하지만 눈을 뜬 사람은 바리사이들의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상세하게 증언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습니까?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다가가시고,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지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는 모든 것을 보게 되었고, 영적인 눈마저 뜨게 된 것입니다.오늘 바리사이들은 진실을 은폐하려 하지만 진실은 결코 어둠 속에 묻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빛의 아들로 처신했지만, 점점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결국 하느님을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지요. 반면, 눈을 뜬 사람은 더욱 빛의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

오늘 복음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여인의 반응은 차가웠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영적인 물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하시자 여인은 마음을 조금 엽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대화가 조금 진전되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전환을 모색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이 말씀에 여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영적인 세계에 눈을 조금 뜨게 된 여인은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벽에 부딪히고는 자신들은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장소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깨달은 여인은 물동이마저 버립니다. 자신 안에 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여인은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는 그 안에서 자신의 부족함, 죄악마저 스스로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평소에는 다른 이들의 결점, 조그만 티끌만을 보다가 마지막에야 자신의 커다란 들보를 발견하지요.

처음부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얗게 변합니다. 이 모습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영적인 생명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있지요. 시련과 수난을 동반하는 현실이라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짐 없이 어찌 영광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을 끝까지 믿고 따를 때 그런 영광을 차지할 수 있음을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람을 통해 알 수 있지요.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말씀을 따름으로써 역경을 축복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성급하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빛과도 같이 변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베드로는 그곳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요.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자세라 하겠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둡다 하더라도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끝끝내 걸어갔던 ‘아브람’이 새로운 사람 ‘아브라함’으로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배고픔을 심하게 느끼시자, 달콤한 유혹이 들어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유혹은 늘 당사자의 입장을 합리화시켜 줍니다.

“그러다 건강을 해친다면 어떻게 큰일을 하겠습니까? 일단 먹고 기운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십시오.”

물론 먹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돌로 만든 빵을 먹을 수 있습니까? 부정직하게 번 돈으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또다시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경향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유혹입니다. 땅에 엎드려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것이지요.

이는 ‘내가 찾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내가 주님 뜻에 맞추려 하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내 뜻에 따라 주어야 만족하는지?’ 이 점을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신앙생활의 불편함,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서운함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떨쳐 버리고 신앙생활의 장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늘 떠올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