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손을 잡고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잡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수많은 괴로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손을 하느님께 내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고통이나 기쁨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손이 하느님의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치욕조차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마리아께

“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힘써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은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탓입니다.

 

어둠과 낙담으로 괴로워할 때에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기를

계속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주님께서 먼저

당하신 고통입니다.

그 예로 단조로움을 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랫동안 심부름하는 사람조차도 없이

홀로 평범한 목수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신뢰> 중에서

이 아침에

좋은 말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이슬은 양은 많지 않지만 식물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특히 사막 같은 지역에서는

이슬이 식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말이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의 좋은 말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한 좋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슬이 아침에 식물을 적셔주는 것과 같이

좋은 말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면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생명수를 공급 받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좋은 말은 소망이 있는 말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말과 책망하는 말은

때로는 소망을 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자기만의 은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소망을 주는 말을 하세요.

이슬과 같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세요

소망을 주는 말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좋은 미사여구를 써서 우유보다 매끄럽게 말을 할지라도

진실 되지 못한 말은

결국 상대를 찌르는 비수와 같은 것이 됩니다.

 

때에 맞는 옳은 말은 기쁨을 줍니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아름다운 말을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식물을 적셔 주는

아침 이슬과도 같이 영롱하게 빛을 낼 것입니다.

— 좋은글 중에서

교무금과 헌금의 차이

성서에 보면 하느님의 몫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시키시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내리셨습니다.

“땅의 십 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레위 27,30-31) 신약성서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켰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태 23,23-24).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재산을 내놓아 공동 소유로 하면서 가난한 자도 없고 부자도 없는 이상적인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사도 4,32-37)

교회는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십일조 전통을 계승하여 교회 유지와 선교사업 등을 위해 매월 의무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하는데 이를 교무금(敎務金)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마르 12,17)은 바로 헌금(獻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와 곡물 같은 것을 봉헌하여 함께 나누어 먹고 나머지는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11세기부터는 빵과 포도주 대신에 헌금만을 봉헌하였으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헌금은 의무는 아니지만 자발적인 신앙심으로 미사 중에 자기희생의 상징 제물로 봉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바치고자 할 때 감사하는 마음과 우러나오는 정성을 가지고 바치도록 해야 하며 정성 없이 혹은 마지못해서 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6-7)

— 서울주보 <클릭 교리> 중에서

부부 이야기

남편은 남의 편이라 했습니다. 남에게만 편한 사람이란 말도 있습니다. 혼인 후 2~3년 지나면 본인도 모르게 힘겨루기가 시작됩니다. 베풀려는 마음이 받으려는 마음으로 바뀔 무렵입니다. 이때부터 고뇌가 찾아옵니다. 바른 선택이었을까? 이 사람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고뇌는 은총의 출발점입니다.

남편이 미울 때마다 아내는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술 마시고 고함칠 때마다 못은 늘어났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여기 박혀 있는 못을 보셔요. 당신이 잘못할 때마다 하나씩 박았던 못이에요.” 나무엔 크고 작은 못이 수없이 박혀 있었습니다. 뭔가 울림이 왔습니다. 아내 가슴에 박힌 못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날 이후 남편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 봐요.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뺐더니 이젠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직은 아니오. 못은 없어졌지만 못자국은 남아 있지 않소?”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넘어갈 땐 반드시 고통이 따릅니다. 부부에겐 고통이 가중되게 마련입니다. 혼자가 아닌 탓입니다. 하지만 한 차원 넘는 고통을 극복해야 삶의 새로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단층으로만 된 줄 압니다. 하지만 인생엔 이층도 있다는 걸 깨달은 이도 많습니다. 일층에서 보는 세상과 이층에서 보는 세상은 분명 다릅니다. 어떤 이는 삼층에서 세상을 보며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삶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입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공존합니다. 직선의 삶보다 곡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생의 깊이에 닿을 수 있습니다.

주관적 입장에서 보면 삶은 늘 고달픕니다. 자신만 고통 받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주관을 객관화하기 시작하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 속에 들어와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은총은 보이지 않게 내립니다. 어떤 땐 축복으로 오지만 시련의 모습으로 올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성숙한 사람은 일정기간 반드시 시련을 겪습니다. 부부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난날의 고통은 성숙으로 가기 위한 남모르는 시련이었을 겁니다.

— 미주 가톨릭신문 <사제일기> 중에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