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남의 편이라 했습니다. 남에게만 편한 사람이란 말도 있습니다. 혼인 후 2~3년 지나면 본인도 모르게 힘겨루기가 시작됩니다. 베풀려는 마음이 받으려는 마음으로 바뀔 무렵입니다. 이때부터 고뇌가 찾아옵니다. 바른 선택이었을까? 이 사람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고뇌는 은총의 출발점입니다.

남편이 미울 때마다 아내는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술 마시고 고함칠 때마다 못은 늘어났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여기 박혀 있는 못을 보셔요. 당신이 잘못할 때마다 하나씩 박았던 못이에요.” 나무엔 크고 작은 못이 수없이 박혀 있었습니다. 뭔가 울림이 왔습니다. 아내 가슴에 박힌 못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날 이후 남편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 봐요.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뺐더니 이젠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직은 아니오. 못은 없어졌지만 못자국은 남아 있지 않소?”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넘어갈 땐 반드시 고통이 따릅니다. 부부에겐 고통이 가중되게 마련입니다. 혼자가 아닌 탓입니다. 하지만 한 차원 넘는 고통을 극복해야 삶의 새로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단층으로만 된 줄 압니다. 하지만 인생엔 이층도 있다는 걸 깨달은 이도 많습니다. 일층에서 보는 세상과 이층에서 보는 세상은 분명 다릅니다. 어떤 이는 삼층에서 세상을 보며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삶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입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공존합니다. 직선의 삶보다 곡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생의 깊이에 닿을 수 있습니다.

주관적 입장에서 보면 삶은 늘 고달픕니다. 자신만 고통 받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주관을 객관화하기 시작하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 속에 들어와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은총은 보이지 않게 내립니다. 어떤 땐 축복으로 오지만 시련의 모습으로 올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성숙한 사람은 일정기간 반드시 시련을 겪습니다. 부부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난날의 고통은 성숙으로 가기 위한 남모르는 시련이었을 겁니다.

— 미주 가톨릭신문 <사제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