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해마다 태어나시는 이유가 우리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오늘 복음처럼 우리도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달리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 만큼 때로 황량한 사막에 들어온 느낌마저 들지요. 사막과도 같은 세상에서 영적인 물을 퍼 올려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평화와 기쁨은 내 힘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성탄은 이웃을 향한 의무의 시기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나와 함께 계시듯이, 나 역시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오늘 복음을 보면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도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요한은 자신이 기대하던 메시아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요한은 왜 이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까?요한은 광야에서 주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만을 외치다 보니, 하느님을 벌을 내리고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시며 어느 누구와도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죄인들과도 어울리다 보니 이런 비난마저 받으셨지요.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이처럼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무서워하거나, 죄를 지은 나머지 스스로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절망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되돌려 주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이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대로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

오늘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이 선뜻 들어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며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힘들기만 하지요.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보상은커녕 고통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요한이 원하는 회개는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던 사람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인간적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는 결심이 회개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외침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우리에게 까닭 모를 어려움마저 겪게 하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려고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유 없는 고통까지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끝내 이를 잘 극복한 분들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생각하지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외침대로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삶 안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어느새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새로운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준비한 사람만이 그분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큰 희망이 없는 순간에 다가오셨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던 조그만 백성은 하느님을 말씀이요 재판관으로 맞이하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세상에 종교적 영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고, 이처럼 보잘것없고 미천한 백성이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채고 따르는 것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의 오심을 알아차리고자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시각으로 깨어 있으면 부르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노아의 시대에 홍수에 휩쓸려간 사람들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오늘날 세상의 삶은 점점 더 정형화되어 가고 ‘컴퓨터화’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계획된 삶에서 삶의 여백은 점점 줄어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휘저으러 오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 영도자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보여 주듯이, 그분의 왕권은 십자가 주위에서 펼쳐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 때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명패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팻말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예수님의 왕직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즉위식에는 늘 두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루카 9,28-36), 예수님의 부활 사화에서는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증인으로 등장합니다(루카 24,4).

그러나 골고타의 즉위식에는 단지 천박한 강도 둘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시시한 즉위식에 오르실 왕은 끝까지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즉위식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적들과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는 직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통해, 뉘우치는 강도를 아버지의 나라로 받아들이시고, 뉘우치지 않는 완강한 적들도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시며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봉사의 직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