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아름다운 성찰

성체의 기적

대 학자이신 성 보나벤투라 의 고향인 빤요레지오로 가는길 중간길에 있는 작은 호숫가에 자리잡은 곳에 중세기풍의 작은 성당이 있다.

이성당에는 아주 젊으신 보좌 신부님이 계셨는데 너무나 열심하고 거룩한 삶을 사시는지라 그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신의를 듬북 받으시는 신부님이 셨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신부님은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미사때마다 몰려오는 의심이 있었답니다.

성혈과 성체를 성변화 시킬 때마다 과연 이 제병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화가 될까하는 무서운 의심이 생기더랍니다.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로변할까?라는 의구심에 미사를 잡념없이 올릴 수 없더랍니다.

이생각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이 들더라지요. 그래서 이 의심이 없어지도록 해달라고 밤새워 가며 기도도 하고 울면서 스스로 편태도 때리며. 울부짖으며 기도로 매일같이 하느님께 매달리셨고 성모님께도 매달려 밤새워 기도하셨답니다. 그런데도 의심은 더욱 강해지고 평상시에는 괜찮타가도 꼭미사때마다 그의심이 강렬하게 일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성체성혈 축일이 되던날 본당 주임 신부님은 본당에서 미사를 올리시고 그옆에 작은 성당 제대에서는 젊은 신부님이 미사를 올리셨는데 그날도 영낙없이 성변화 시간에 또 의심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거양성체를 마치시고 잠시 눈을 감으셨는데 복사가 갑자기 비명을 올려 놀래 눈을 뜨고보니 제대위에 성작에서 피가 끓어오르고 그피는 제대포와 성체포를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면서 신부님의 제의까지 적셔지더라는 거예요.

이 광경을 보신 신부님은 그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으시고 복사는 놀라 도망을 치고, 교우들의 전달로 본당에서 미사를 마치신 주임신부님께서 작은 성당에 들어 가셔서 그 광경을 보신후 또 졸도를 하셔서 신자들이 교구에 알려 주교님께서 오시어 재대포와 신부님의 제의, 성체포등을 성작에 담아 감실에 모시고 졸도하신 신부님들을 병원으로 옮기셨답니다.

그이후 매년 성체성혈 축일에는 그 감실문을 열어 순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날은 지금도 성작안에 말라붙은채로 계신 예수님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 성작안에서 금방 흘리신 피로 변했다가 미사가 끝나고 예절이 끝나면 다시 마른 피 상태로 돌아 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전주교구에서 사목하시던 오기순 신부님께서 직접그곳을 방문하시고 보시고 쓴 글에서 나왔습니다. 그레고리안 대학 유학시절 교수신부님이 그역사를 알려 주시며 기회가 닿는데로 한 번 가보라고 하셔서 가셨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이 책을 40년전에 읽고 그때부터 성체를 모실때는 너무 조심스럽고 작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소흘히 할까봐 매우 신경이 써집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성체,성혈에 대한 경외심이 돈독해지는 것을 느끼게되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 이 영성체 시간은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 저는 그 순간을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고 감사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요즘은 몸이 안좋아 운전을 할 수없어 평일 미사를 못나가는 날이 많은데 그럴때는 성체가 고파서 목이 마를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매일 영하고 행복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성체는 우리 신자들의 전부며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빵입니다.

살아계신 그 분을 우리안에 모시게 되는 것은 우리의 피와 예수님의 피의 결합이며  너무나 소중한 생명의 결합임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같이 생각하고 예수님같이 생활하는 사랑의 매신저가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오기순 신부님의 저서를 보고

ㅡ 황세시리아 ㅡ

 

어느 인디언의 기도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에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재의 수요일 아침에

재의 수요일 아침에 

                                              -이해인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마에 재를 얹어 주는 사제의 목소리도
잿빛으로 가라앉은 재의 수요일 아침
꽃 한송이 없는 제단 앞에서 눈을 감으면
삶은 하나의 시장기임이 문득 새롭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자기의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숨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발견에 차츰 무디어 가는
내마음을 위해서도
오늘은 맑게 울어야겠습니다.

먼지 낀 마음의 유리창을
오랜만에 닦아 내며 하늘을 바라보는 겸허한 아침
땅도 사람도 가까워질 수 있음을 새롭게 배웁니다.

사랑없으면 더욱 짐이 되는 일상의 무게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조차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
이 또한 기도의 시작임을 깨닫는
재의 수요일 아침입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문의 깊은 의미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너희들은 불리움을 받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왜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가? 하느님이 안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가게 되었답니다. 그 부자가 영원히 살 집으로 천사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아주 초라한 판자집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펄쩍 뛰면서 “아니 나는 지상에서도 호화주택에서 살았는데 하물며 이 좋은 천국에 와서 어떻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냐”고 불평을 했답니다. 그러니 천사가 하는 말이 “ 이 판자집은 당신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보내준 자재로 지어진 것 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손을 떠나서 이웃에게로 나누어진 것만이 하느님 앞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잠언 30, 7-9 아구르의 잠언 을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장봉훈주교님 -행복은 어디에-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