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십니다.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인 1845년, 중국 상하이 근처 김가항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하여 1년 남짓한 짧은 사제 생활 끝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입니다.참으로 고귀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김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운 최초의 한국인이었지요.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직 하나만을 택하고 맙니다. 바로 하느님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순교의 칼을 당당히 받았던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끝까지 사제의 길을 지킬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까? 물론 본인의 신심과 열정에서 나왔겠지만, 그 뒤에는 많은 교우가 드린 기도의 힘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제들의 힘과 능력, 용기는 신자들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제들이 순수함과 열정을 잃지 않도록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사제의 노력과 능력을 메워 줄 영적인 힘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신앙과 박해

역사 안에서 교회는 자주 박해와 부딪칩니다. 교회가 살아가는 그 주변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다른 고통과는 달리 의인에게 주어지는 폭력입니다.이사야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당함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고 불편해 하지만, 주님의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예언자를 박해했던 자기 조상들의 불의를 이어 가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계산은 어긋날 뿐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1코린 2,8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늘 새롭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온통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가난, 그리고 용서를 외치는 이는 틀림없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체와 성혈

우리의 삶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그 존재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연인처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서로 생각하고, 먼 거리지만 그 현존을 생생하게 느낄 때도 있습니다.그중에서도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는 절대자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분의 존재를 느끼면,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뢰감과 안정감을 얻게 되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라고 고백하게 됩니다.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그분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처럼, 그분도 우리를, 아니 우리보다 더 우리를 그리워하고 갈망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그 애타는 갈망이 결국 그분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전해 주십니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분을 우리의 삶 안에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예수님의 현존을 바로 오늘의 내 삶 안에 다시 살아나게 하고, 나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바꾸어 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삶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된 부부도 계속 하나가 되어 그 행복을 유지하며 살려면 수많은 수고를 겪고 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강력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수많은 갈등과 질곡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존재론적 모순의 논리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존재론이나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끝없는 애정으로 성자를 바라보시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 흐르는 그 뜨거운 사랑 자체가 바로 성령이시라는 어느 신부님의 설명이, 세 분이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이 교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이 가장 뜨거운 신비에 참여하는 행복한 존재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에 푹 빠진 기쁨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 선물

오순절이 되었을 때, 거센 바람처럼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불꽃처럼 우리를 타오르게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제자들에게 보내 주신 성령께서는,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성령께서는 제도와 율법에 기초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갇혀 있던 제자들을 세상으로 뛰쳐나가게 하시고, 교회에 필요한 은총을 베푸시어 교회가 세상 안에서 활짝 꽃피게 하십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언어의 은사를 주시고, 어떤 박해나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증인이 되어 그들이 보고 전해 들은 것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으로부터 생명력을 받아 오늘도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성령의 생명력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평화입니다.

싸우지 않고 전쟁을 치르지 않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과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세상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모든 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화해와 일치의 평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