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지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으로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첫째는 농부가 직접 밭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한, 노새를 이용해 씨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씨앗이 담긴 자루를 노새의 등에 얹고, 그 자루 한 귀퉁이를 조금 찢어 구멍을 냅니다. 그러면 노새가 밭을 걸어가는 동안 씨가 저절로 자루 속에서 흘러나와, 밭에 뿌려지게 되지요.

씨앗이 떨어진 곳에 따라 결실이 다르듯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말씀이 맺는 열매는 천차만별이라 하겠습니다.먼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없지요. 따라서 길과 같은 마음은 편견이나 선입관을 갖고 남을 대하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돌밭과 같은 마음은 쉽게 달궈졌다가 쉽게 식는 마음입니다.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엇을 계획한 뒤, 어떤 위기가 찾아오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열정을 다해 하느님의 길을 걷다가도 시련이 닥치면 이내 하느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은 세상 여러 일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실천하는 신앙인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늘 마음을 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안식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이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간에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였지요. 바로 이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계명만을 바라보다 보니 그만 계명 자체에 얽매이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안식일 준수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을 맞아 일하지 않는 동안 속수무책으로 적에게 학살당하기도 하였습니다(2마카 5,25-26 참조). 안식일에는 불을 붙이거나 끄지도 못하고, 빵 굽기, 바느질마저 금지하였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멍에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어떤 분으로 보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힘들고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풀어 주신 것입니다. 지킬 수 없는 형식적인 계명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돌려 주셨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보다 근본정신을 강조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것을 참으로 쉽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십니다.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인 1845년, 중국 상하이 근처 김가항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하여 1년 남짓한 짧은 사제 생활 끝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입니다.참으로 고귀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김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운 최초의 한국인이었지요.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직 하나만을 택하고 맙니다. 바로 하느님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순교의 칼을 당당히 받았던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끝까지 사제의 길을 지킬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까? 물론 본인의 신심과 열정에서 나왔겠지만, 그 뒤에는 많은 교우가 드린 기도의 힘이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제들의 힘과 능력, 용기는 신자들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제들이 순수함과 열정을 잃지 않도록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사제의 노력과 능력을 메워 줄 영적인 힘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신앙과 박해

역사 안에서 교회는 자주 박해와 부딪칩니다. 교회가 살아가는 그 주변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다른 고통과는 달리 의인에게 주어지는 폭력입니다.이사야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당함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고 불편해 하지만, 주님의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예언자를 박해했던 자기 조상들의 불의를 이어 가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계산은 어긋날 뿐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1코린 2,8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늘 새롭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온통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가난, 그리고 용서를 외치는 이는 틀림없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체와 성혈

우리의 삶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그 존재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연인처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서로 생각하고, 먼 거리지만 그 현존을 생생하게 느낄 때도 있습니다.그중에서도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는 절대자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분의 존재를 느끼면,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뢰감과 안정감을 얻게 되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라고 고백하게 됩니다.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그분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처럼, 그분도 우리를, 아니 우리보다 더 우리를 그리워하고 갈망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그 애타는 갈망이 결국 그분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전해 주십니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분을 우리의 삶 안에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예수님의 현존을 바로 오늘의 내 삶 안에 다시 살아나게 하고, 나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바꾸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