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산 제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호함이 엿보입니다. 맺고 푸는 열쇠까지 받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적인 유혹과 욕망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예수님의 결연함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현실의 처지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조롱과 놀림을 받고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뼛속’에 그 말씀을 가두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시면서 예언자의 길이 세상과 맞서는 험난한 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수차례 전도 여행에서 칭송과 존경보다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의 전부로 여길 만큼 복음의 기쁨 속에 살았기에 역경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날마다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삶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전해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으로, 어떤 이들은 용맹한 예언자 엘리야로, 또 어떤 이들은 고통 받은 예언자 예레미야라고 한다고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물으신다면 사람들은 더 유식한 언사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설명할 것입니다. 수난 받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 성전을 정화하신 메시아,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답변이나 의견을 설명하면서 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나 학설을 대며 자신의 의견을 치장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개인적 체험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메시아 신원을 밝히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사도들의 믿음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를 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십자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산 호렙 동굴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그는 강한 바람과 지진, 불길이 지난 다음에야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들어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엘리야는 부드러운 미풍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찬 바람에 맞서 배를 몰고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신적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동포인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몰라보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영광을 받았음에도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믿게 할 요란한 표징과 기적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역경 중에 헤맬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존재 자체이신 그분께서는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침묵 중에 믿고 기다릴 때,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잔잔한 미풍처럼 그분께서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실존을 감싸 안고 위로해 주십니다.

사목위원 연수를 다녀와서

맑고 쾌청한 토요일 아침 벨플라워에 위치한 LA 한국 순교자 영성센터에 신부님, 수녀님, 사목위원들이 모여 10시 말씀의 전례로 연수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가와 말씀, 신부님의 기도로 주님께로 마음을 모으고, 주님 안에 하나 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한국의 소록도에서 43년을 봉사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신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하였습니다.

그분들은 병마와 편견으로 소외된 소록도 한센병 환우들에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이었습니다. 봉사의 열정, 끈기, 강인함, 겸손함을 모두 갖춘 그분들의 삶을 보며 우리가 봉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결같이 봉사를 통해 오히려 ‘기쁨과 평화’를 얻으셨다는 말씀은 우리도 봉사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생활이 되리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살아오신 분이 그분들을 ‘사랑이 의인화된 분들’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고통에서 신앙을 지키는 순교만큼이나 평생을 바쳐 봉사한 그분들의 삶 또한 또 다른 순교가 아닐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그룹원들과의 나눔과 신부님의 강의로 봉사의 의미와 봉사자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황님의 ‘주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말씀처럼 봉사자는 작은 일에도 충실하고, 씨앗이 되는 섬기는 삶, 일회성이 아닌 전문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봉사에 임해야 됨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목위원의 십계명을 통해 마음을 다잡고 봉사의 열정이 끓어오르고, 어떻게 봉사를 실행해야 되는지 계획과 기도의 사목위원이 될 것을 다짐하며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연수를 통해서 신부님의 열정을 느꼈습니다.

그 열정이 저희 사목위원들과 교우분들에게 전해지고 바실 성당 모든 교우들이 ‘기도하고 친교하며 하나 되는 공동체’로 발전해 가기를 기도드립니다.

홍보분과장 유승목 요한

가라지와 밀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면 종들은 밀밭에 난 가라지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고,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지 모르니 수확 때까지 두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종과 주인의 시각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가 밀을 해칠까 걱정되어 가라지를 뽑으려 하였지요. 반면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 밀이 상할까 걱정되어 뽑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듯이 우리 사회도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가라지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누구에게나 밀과 같은 요소가 있듯이, 가라지 같은 요소도 있지 않습니까? 가라지는 자신의 단점이나 부정적인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 가라지를 예수님께서는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결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라지가 마치 가시처럼 되어 자신을 찌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면 비난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점이 있을수록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단점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숨어 있는 자신의 가라지를 찾아내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인정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더욱 청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심어진 가라지를 모두 뽑아 주실 것입니다. 가라지를 인정하고, 치유해 나가며, 더불어 선하고 좋은 면을 발견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