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과 성자

어떤 형제가 배를 훔치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분노한 주민들이 형제들의 목을 매려 하자 촌장이 그들을 막으며 소리쳤다. 

“비록 저들이 악인일지라도 우리 마음대로 목숨을 빼앗을 순 없소. 대신 도둑질을 했다는 표시를 새겨 놓으면 평생 어딜 가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이오.” 

사람들은 촌장의 말대로 형제의 이마에 커다랗게 ‘ST(Ship Thief : 배 도둑)’라고 새겨 넣었다. 그 뒤 사람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저기 ST가 지나간다. 저 글자가 무슨 뜻인 줄 아니? 바로 배 도둑이라는 뜻이야. 하하하!” 하고 놀려댔다. 견디다 못한 형은 밤을 틈타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마에 새긴 글자에 대해 묻는 사람들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형은 좌절감에 빠져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동생은 끝까지 마을에 남기로 하였다. ‘어디로 간들 내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곳에 남아 죄과를 달게 치르리라.’ 동생은 사람들이 내뱉는 온갖 비난을 묵묵히 견뎠다. 세월은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동생에 대한 비난은 점차 줄어들었고 묵묵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우연히 그 마을을 지나다가 한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를 보게 되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나그네는 길을 가던 이에게 그 노인의 사연을 물었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라 잘은 모르지만 저 분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 분처럼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요. 아마 저 이마에 새겨진 글씨는 ‘성자(Saint)’의 약자임이 틀림없을 겁니다.”

-영국 웨일즈의 전설

슈바이처의 생애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모교인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에 적도 아프리카(지금의 가봉공화국)로 떠났습니다. 

슈바이쳐는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 중에서 3가지를 포기했습니다. 첫째는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고, 두 번째는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대학교수직을 포기했었고, 세 번째는 풍요롭고 안락한 자신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한 후 적도 아프리카의 오고웨 강변 랑바레네에 병원을 설립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을 위해 병을 고쳐주고 영적인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슈바이쳐의 희생과 사랑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것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슈바이쳐는 그토록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었지만 바하 협회는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연주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어주었고 대형 오르간을 선물했습니다. 또한 존경과 명예가 뒤따르는 교수직을 포기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평생 동안 강의할 만한 강의 시간을 단 일년 동안에 모두 허락하셨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그에게 대학마다 앞 다투어 초청해서 그의 강의를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었지만 그가 저술한 자서전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신의 선택한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그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에 관심을 두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비워졌는지에 관심을 두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깨끗한 빈 그릇이 되어질 때 주님은 우릴 통해 주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주 호식 바드리시오 신부 글 중 발췌

마지막 깨달음

다음의 글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한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 적혀 있는 글이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 중에서-발췌

 

우리도 지금 성당에서 진행되는 구호들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세례명을 부르고, 내가 먼저 가족에게 대화하는 솔선수범이 우리 공동체를 환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먼저 실천할 때, ‘기도안에서 친교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유 승목 요한

예수님의 셈법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세상 셈법과 사뭇 다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경제 정의의 기초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한 일꾼과 먼저 와서 종일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데 이는 우리의 경제 정의와 맞지 않습니다.

비록 포도원 주인과 일꾼이 맺은 계약으로 본다면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정당하지만, 먼저 일하러 온 일꾼이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이런 우리의 익숙한 경제 정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품삯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양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차별로 느껴지는 품삯일 수 있지만, 하느님께는 같은 무게를 지닌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 사랑을 더 받고 덜 받는 문제는 하느님의 방식이지 인간의 방식이 아닙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것이 세상의 잣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고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가 곧 자신의 삶이고 죽음이 이득이라는 역설을 말하는 것도 세상의 논리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복음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먼저 복음을 들은 우리가 선점한 구원의 보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마음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임을 잊지 맙시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불사의 희망’, 죽음도 꺾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기대일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생기려면 바오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 불사의 희망,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저마다 짊어져야 할 삶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 살기 위해 다녀야 하는 직장, 보기 싫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 힘겨운 학업, 떨쳐 버리지 못하는 지병, 경제적인 빈곤, 희망 없는 인생, 맞이해야 할 두려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의 칼 앞에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이라고 이런 인생의 십자가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자들이 배교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 속에서도 ‘불사의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은 수행의 연속이고, 그 수행의 끝 날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