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동 보좌시절의 일이다.
아침 일찍 수녀님의 전화를 받았다.
“신부님!
오늘 오후에 병자성사 가 주실 수 있어요?”
당연히 갈 수 있지요!
사제가 병자성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엄하신 신부님 아래 살며
배웠던지라 한 번 더 확인을 하여야 했다.
“그 환자가 성체를 영할 수 있나요?”
“신부님! 그게요,
이 환자가 폐암 말기 환자인데요.
폐암 말기 환자들은 그렇다네요.
암세포가 마지막에 모두 뇌로 올라가서 극심한 치매상태가
된다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그 환자는 아무것도 분간을 못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정색을 하며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그러면 수녀님!
저는 갈 수 없어요.
성체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인지할 수 없는 상태라면
병자성사가 의미가 있을까요?”
가끔 병자성사를 가면
보호자들이 성체를 영할 수 없는
환자들의 링거 줄에다가 성체를 조금만 넣어 줄 수 없냐고 생떼를 부리던 것을 보며 이건 아닌데 싶었다.
게다가 엄하신 신부님 아래
살았던 덕에 병자성사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던 나였다.
하지만 수녀님께서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씀하셨다.
“신부님! 그래도 가셔야죠!
혹시나 신부님이 성체를 모시고
병원에 도착한 그 순간 잠시라도
그분의 정신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말에 설득된 나는 어느새 수녀님과 봉사자와 함께
성모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격리병실에 들어선 순간 온몸이 줄로 묶인 채 누워 있던 환자의 모습을 보고 아직 햇병아리 신부였던 나는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방금 발작을 멈추었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조심스레 다가가서 환자에게 물었다.
“형제님!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러자 환자는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신부님 아니신교?”
놀란 내가 성체를 보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이건요?”
환자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참내! 예수님의 몸 아닌교?”
수녀님과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은 후 환자에게 전대사를 베풀고,
성유를 바르고,
성체를 들어 눈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몸!”
형제님은 눈을 사르르 감고
순한 어린양처럼 “아멘!”이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성체를 영했다.
안심한 내가 마침기도와 안수를 드리려 하는데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크흐흐으으윽~”
설마! 하느님 제발…..
“퉤~”
그렇게 모두의 눈앞에서 성체는 환자의 가래침과 함께 병실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어릴 때 제의방에서 읽었던
‘성체의 기적’이란 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떤 암환자가 성체를 영한 후
그것을 모독할 마음으로 뱉었는데 하녀가 그것을 걸레로 싸서 벽난로에 던졌더니 갑자기 난로가 하얗게 빛나다가 성체가
하늘로 둥둥 떠서 빛나다 사라졌다는 그 이야기!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벌벌 떨며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영대를 끌러 성체를 가래침과 함께 훔쳤다.
그리고 돌돌 말아 가슴에 품었다.
“이래서 제가 오지 않으려고 했던 거예요!”
돌아오는 차 안은 엄청난 무게의 침묵 그 자체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를 어쩌지?
신학교에서는 성체가 모독당하는 순간 이미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그때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신부님!
그 성체 어떻게 하실 거죠?”
옆에 있던 봉사자는 이렇게 거들었다.
“김웅렬 신부님은 신자가 뱉은 성체를 집어 드셨다고 하시던데….”
하필이면 김웅렬 신부님께서
본당에 특강을 오신 직후였다.
아무 말도 못하는 내게
수녀님께서 한 방 날리셨다.
“그 성체!
저에게 주세요!
제가 영하겠습니다.”
인보성체수녀회의 사비나 수녀님.
수도회의 카리스마답게 얼마나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으시던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셨다.
하지만 신부가 어쩌지도 못한 성체를 수녀님께서 영하시면
나는 뭐가 되나?
그래서 정색을 하며 말씀드렸다.
“안 됩니다. 수녀님.
깨끗한 천에 싸서 땅에 묻겠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몇 번을 더 본인이 영하겠다고
수녀님께서 말씀하시다가 내가 결국 화를 내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마셨다.
그렇게 돌아온 반지하 사제관.
한낮에도 캄캄했던 그 방 안에서
초를 켜고 돌돌 말아두었던
영대를 풀었다.
이미 가래침은 영대 속으로
스며들고 성체만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본당 신부님과 상의하고 싶었으나 출타중이셨고
나는 성체를 땅에 묻을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영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이렇게 맘을 정했다.
‘그래 영하자!
나는 사제다!’
참 신기하게도 그 순간 걸려온 전화.
“니 뭐하노? 바쁘나?”로 시작되는 친근한 목소리는 같은 반 동기신부였다.
이차저차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동기신부가 흥분하여 이렇게 말했다.
“니 돌았나?
절대로 안 된다.
땅에 묻어라!
니 그러다 죽어도 우리 동기들
니 관 무거워서 못 든다!
알겠나? 절대로 먹지 마라!”
흥분한 동기신부의 투박한 그 말에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전화를 끊고 화사하게 웃으며 ‘다행이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주님!
죄송하지만 묻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그때 다시 걸려온 전화….
초등학교 동창,
가정의학과 의사인 근영이었다.
설명을 들은 그 친구는 깔깔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야! 암은 자기면역이라
전이는 되어도 전염은 안 돼!
뭘 고민하냐?
그냥 먹어!
너 신부 아니니?”
귀 얇은 어린 신부.
신자도 아닌 그 친구의 말에
갑자기 용기를 얻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주님! 많이 섭섭하셨죠?
에이! 장난이었어요!
저 영하겠습니다.”
그렇게 성체를 영하려 하는데
참 신기하게도 또 한 통의 전화가
급하게 걸려왔다.
올리베따노의 실바노 수사님께서
미사 부탁을 하러 전화를 거셨네.
삼세판이라고 했던가 한 번만 더
수사님께 여쭤보자 싶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수사님께서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요나 신부 좋을 대로 하세요!
묻어도 죄가 안 되고
영해도 괜찮아요!
그대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우유부단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서품식 때
바닥에 엎드려서 울먹이며 속삭이던 나의 고백이 생각났다.
“주님!
당신은 이렇게 처참하게 버려진 저를 일으켜 세워 사제로 삼으셨습니다.
저도 언제 어디서건 당신이 버려지신다면 달려가 당신을
일으켜 세워드리겠습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침에 불어 영대에 달라붙은 성체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쓰러지듯 잠이 들어 24시간을 엄청난 고열과 땀으로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스르륵 일어난 나는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습관처럼 혈당체크기를 꺼내
새끼손가락을 찔렀다.
그 당시 나는 앞 본당에서 얻은
스트레스성 당뇨로 공복 혈당이
290이하로 떨어진 날이 거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공복혈당은 100이었다!
그렇게 되찾은 건강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100점이란 말인가?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기쁘게
군종 소임을 받았다.
우리는 항상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웃에게서,
형제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하지만 하느님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아니 그분을 버린다 하더라도….
이것이 내가 몸소 배운
성체의 기적이다.
– 군종교구 김홍석(요나) 신부 –